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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항일녀걸6] 8녀투강의 또 하나 영웅 리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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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자| 작성일 :19-11-19 11:14| 조회 :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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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6] 8녀투강의 또 하나 영웅 리봉선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4-10 15:34:35 ] 클릭: [ ]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 -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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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봉선렬사 화상(자료)

 

중국혁명사에 길이 남을 항일련군 부녀퇀의 팔녀투강, 팔녀투강의 8명 녀전사들 가운데는 4군의 재봉대 대장 안순복과 더불어 또 하나의 조선족 녀전사 리봉선(李凤善)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리봉선녀전사에 대해서 알려지는바가 거의 없다. 안다면 리봉선은 조선족이고, 희생될 때 20살이고, 흑룡강성 림구현 룡조향 사람이고, 항일련군 제5군부녀퇀의 녀전사라는 두어줄 자료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 두어줄자료가 리봉선이 조선족이다, 20살이다를 알리는외에도 림구현 룡조향(龙爪乡)사람이고 소속부대가 항일련군 제5군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던지고있어 그런대로 리봉선렬사의 발자취를 추적할 기회와 공간을 안겨준다.

 

리봉선의 출신지로 알려지는 룡조향은 림구현의 중부, 현성의 서남 12키로메터 거리에 위치하고있다. 룡조향의 지명래원은 룡조촌이라는 마을이름에서 나왔으니 룡조촌 마을형성은 1918년 이전으로 거스른다. 마을이 생겨날 때 마을은 심산밀림속에 위치한데서 범이요, 메돼지요 하는 산짐승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고장이였다. 더우기 야생사슴들이 많아 사람들은 마을이름을 사슴의 록용(鹿茸) 용자를 따서 용각구(茸角沟)로 불렀다. 1931년에 소리 음에 따라 룡조(龙爪)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룡조촌을 보면 중화민국 초년에 의란현(依兰县)에 소속되였다가 1917년에 벌리현(勃利县)에 귀속되고, 1939년 6월에는 림구현(林口县)에 귀속되는 과정을 거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인 1947년에 룡조촌은 림구현 제5구에 소속되고 1956년에 구를 취소하고 향을 설치하면서 룡조향으로 나타났다. 1958년에 룡조인민공사로 개칭되였다가 1984년에 이르러 다시 룡조향으로 회복되기도 하였다. 이같은 지명의 연변과정을 보면 리봉선을 림구현 룡조향 사람이라고 하면 원칙상 틀린다고 볼수는 없지만 바르게 된 지명부름으로 되지 못한다. 룡조향이 설치된것이 해방후 1956년의 일이고, 리봉선이 활동하고 희생되던 1938년 그 시절에는 림구현이 아닌 벌리현 귀속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리봉선의 고향이 그제날 벌리현 룡조촌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룡조촌에서 태여났다는 자료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기때문이다. 어찌하든 리봉선이 1919년에 태여나 룡조촌에서 생활하였음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리봉선 연구에서 룡조촌이란 지명에 이어 문제로 나서는것은 리봉선이 어느때 어떻게 항일련군 제5군 부녀퇀에 가입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5군부대와 5군부녀퇀을 연구하지 않으면 리봉선의 5군부녀퇀 가입을 알수가 없으며 리봉선의 발자취를 추적할수도 없다.

동북항일련군 제5군은 수녕(绥宁)반일동맹군,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동북항일련군 제5군이란 3개의 발전변화 시기를 거치게 된다. 첫번째 시기인 수녕반일동맹군 구성은 1934년 2월의 일이고, 그해 12월에 녕안반일유격대 등과 함께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으로 개편된다. 주요활동지는 녕안현 경내였다. 1935년 4월이후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은 동부파견대, 서부파견대, 녕안류수부대 등 세갈래로 나뉘여져 새 유격구 개척에 나서게 된다. 동부파견대는 동부의 목릉현쪽으로, 서부파견대는 액목현쪽으로, 류수부대는 녕안현 각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린다. 하지만 그 시절의 반일련합군 5군은 녕안과 북으로 150키로메터 떨어진 림구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시절의 5군부대에는 림구현의 리봉선이 가입할 여건이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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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월, 주보중장군이 지도하는 동북반일련합군은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재편성되면서 그 주력부대가 중동철도 북부(中东铁路道北)로 전이하게 된다. 1936년 9월 24일 녕안 천안두(泉眼头)에서의 2군-5군간부회의후 항일련군 5군군부는 북부지대의 림구현에 전이하여 군부림시판사처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5군군부와 1사부대는 림구현의 조령(刁翎)을 중심으로 하는 목단강 하류지구에서 정치, 군사활동을 벌려간다. 1937년 2월과 3월 사이에 이르러 항일련군 제5군은 중동선 이남의 류수부대를 제외한 1사와 2사, 군부 직속부대 모두가 림구현의 조령을 근거지로 하는 목단강 하류지구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리봉선 소속 5군부녀퇀은 1936년 봄 녕안에서 동만 즉 연변의 훈춘현과 왕청현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로 조직된 부대이다. 부녀퇀의 대부분이 5군 제1사와 5사의 여러 부대들에 소속된데서 1936년 여름 5군 직속부대로 군부를 따라 목릉, 림구 등지로 전이할 때의 부녀퇀 녀전사는 1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서운경, 《항일련군의 영웅적자매들》, 제19페지) 이들 부녀퇀 10여명중 부녀퇀 퇀장 왕옥환(王玉环)외 최순선(崔顺善), 주신옥(朱信玉) 등 전부가 연변출신의 조선족녀전사들이였다.

1936년 2월이후 항일련군 5군 군부와 제1사, 2사 그리고 군부직속 부녀퇀이 림구현 조령근거지를 중심으로 림구현 각지와 림구 일대에서 활동한데서 조선족이 얼마 되지 않는 오늘의 림구현 룡조촌에서 생활하던 리봉선이 5군부대, 더우기 군부직속 부녀퇀 조선족녀전사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5군부녀퇀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되였다. 그 가입시간은 늦어도 1936년 9월 이전으로 헤아려볼수가 있다. 남부의 녕안현에서 조직된 항일련군 5군부대와 군부직속 부녀퇀의 림구현 경내에서의 활동은 세상과 두절되다시피 한 심산밀림속 룡조촌의 리봉선을 5군부녀퇀으로 손잡아주었다.

5군부녀퇀의 주요과업은 전투가 아닌 재봉대가 중심으로 나타난다. 1936년 여름과 가을 그 시절을 두고 5군부녀퇀 출신인 서운경(徐云卿)은 자기의 항일련군회고록 《영웅적 자매들》(중문판, 길림인민출판사, 1960년 4월 제1판, 1978년 11월 제2차 인쇄, 제5페지)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그들은 긴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머리우에단 손재봉틀을 이고 다녔다. 낮이면 산속에 들어가 전사들을 위해 군복을 지었고 밤이면 백성들 집에 주숙하면서 정치도 배우고 문화도 배웠다.

5군부녀퇀이 5군재봉대이기도 하다는 부녀퇀 녀전사 서운경의 회고이다. 서운경의 회고에 따르면 5군부녀퇀(리봉선이 참가하기전)은 1936년 7월에 군부를 따라 녕안에서 림구현 삼도통일대로 전이하는 도중에 목릉현 무가마골(萝卜窑沟)에서 한달 남짓이 주둔하다가 한패의 신전사를 받아들이고 지방조직을 건립, 그뒤 8월경에 오늘의 림구현 조령에 이르러 정치, 군사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조령에 머무르는 그 나날, 5군군부에서는 조령과 그 일대에서 항상 군중대회를 소집하면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여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5군부대에 참가하였다.

군중대회가 끝나면 5군은 부녀퇀을 선두로 번마다 무대를 꾸미고 연극도 하고 성수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 항일기분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리봉선의 5군부녀퇀 가입은 이 시기의 일이다. 조선족녀전사들을 선두로 하는 5군 부녀퇀의 끓어번지는 항일열성은 리봉선의 마음을 강하게 끄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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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5군부대는 조령에 주둔하고 신입녀전사 리봉선 소속 부녀퇀은 군부를 따라 산우의 하마골(蛤蟆沟)부근에 자리잡고있었다. 부녀퇀은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조령에 내려가 하고 점심은 무우에 사탕가루를 찍어 먹었다. 그럴 때면 리봉선이랑 부녀퇀 녀전사들과 함께 항일련군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항일련군의 녀전사가 된 기쁨을 그대로 나타내였다.

달님도 구름속에 숨은 어두운 밤/ 항련전사 산을 내려 원쑤를 치네/ 교묘한 수단으로 꾀여냈더니/ 왜놈들 덮치다 함정에 빠졌네/ 산놈은 두손 들고 죽은놈은 황천객/ 한놈도 남김없이 몽땅 잡았네.

리봉선 소속 5군부녀퇀은 조령(刁翎)과 그 일대에서의 군중조직화가 뜻대로 되여가자 이번에는 활동무대를 110여리밖의 소강연 류수하자촌(小江沿柳树河子村)으로 옮기였다. 새 활동지에서 5군군부가 지방조직과 련계를 맺으며 주변 지형을 살필 때 부녀퇀에서는 군민대회를 조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직접적인 항일선전외에도 다시 무대를 꾸미고 노래를 부르고 연극을 놀며 성세를 일으켰다. 인물이 절색인 리봉선 등 조선족 녀전사들이 춤을 어찌나 잘 추는지 마을사람들은 비빌틈도 없이 모여 구경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8녀투강중의 한 사람인 양귀진(杨贵珍)의 부녀퇀 참가는 이때의 일이다.

류수하자에서 하루길을 걸으면 조령의 서부로 되는 목단강반의 삼도통(三道通)에 이르게 된다. 목단강을 사이둔 강동쪽은 위만군의 주둔지였다. 이자들이 때때로 건너와 아군을 교란하는데서 리봉선 등 부녀퇀의 전사들은 드센 함화공작을 들이대였다. 함화공작의 내용은 항일가요 부르기와 정치선전 결합이였다. 부녀퇀에서는 함화공작과 더불어 우리 부대장병들의 옷과 양말을 씻고 깁느라고 한가할 사이가 없었다. 저녁이면 군부의 지시로 부녀퇀과 청년의용군이 함께 군민련환회를 조직하고 좌담회를 열군 하였다.

5군부녀퇀은 삼도통에서 10여일간 머무르며 활동하다가 조령, 련화(莲花), 소강연 일대에 가서 활동을 벌리였다. 삼도통에 다시 돌아온후에는 5군군부에서 조직한 아침, 저녁 두개 반 식자학습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리봉선은 식자반에서 훈춘출신의 최순선, 주신옥 등에게서 우리 글을 보다 익히기도 하고 중국인전사들한테서 한문을 배우기도 하면서 자기의 부대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1937년 새해를 앞두고 5군부녀퇀은 명령을 받고 청년의용군과 함께 대반도(大盘道)저격전에 참가할 기회를 가지였다. 리봉선이 부녀퇀에 참가한후의 첫번째 전투였다. 적들도 말짱 300여명의 왜놈들에다 200여대의 말파리에 입쌀, 밀가루, 고기와 탄약 등을 운반하는 부대여서 싸울만도 하였다. 그러나 부녀퇀은 5군군부의 안전을 보위하고 싸움터를 수습하는것뿐이여서 적들과 통쾌히 싸울수는 없었다. 대반도저격전후에도 수차의 전투가 있어도 의연히 최전방 전투가 아니였다.

대반도저격전후, 적절히 말하면 1937년 2월초 리봉선 소속 부녀퇀은 군부의 지시로 청년의용군과 함께 밤낮 하루동안에 눈 덮인 180리 산길을 걸으며 깊은 산속의 후방밀영으로 떠났다. 목단강 동쪽과 의란현 동부에 위치한 이곳 후방밀영에는 일부 부상병들과 부녀퇀의 몇몇 전사들이 먼저 머무르고있었다. 한동안의 긴장한 로동속에서 100명 정도의 부상병을 받아들일수 있는 후방병원이 새로 일떠섰다. 다가오는 봄을 대비해 5군 전체가 갈아입을 새군복도 지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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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당년 5군부녀퇀 퇀장 왕옥환과 부녀퇀 지도원 왕일지 평양에서(자료사진). 

 

새로 확건된 후방밀영에서 부녀퇀은 5군의 재봉대 역할을 놀았다. 3명의 녀전사가 재봉기 한대를 맡아 밤낮 륜번으로 다루며 새 군복을 지어냈다. 후방밀영에 또 한패의 부상병들이 들이닥치여 리봉선 등 10여명 녀전사들은 밀영의 이불과 요, 의복을 말끔히 빨고 기우며 병원안팎을 질서정연하게 꾸며놓았다. 밤에는 후방병원 문앞에 우등불을 피우고 부상병들과 부녀퇀이 함께 련환모임을 가지였다. 리봉선, 최순선, 주신옥 등 조선족녀전사들은 한족녀전사들과 함께 《적기가》, 《부녀해방가》 등 노래를 마음껏 부르다가 우등불을 둘러싸고 조선춤을 추었다.

 

5군부녀퇀은 평소에는 선전활동과 재봉, 옷 씻기와 깁기, 부상병 돌보기, 정찰과업 등으로 보내지만 필요시에는 전투원으로 직접 싸움마당에 나섰다. 1937년 5월 4일의 의란현 경내 희샤즈요저격전이 그 대표적인 실례로 나선다.

이날 이른아침, 5군군부는 군부정찰대로부터 일본군 300여명이 10여대의 군용트럭에 앉아 희샤즈요(黑瞎子窑) 방향으로 달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군부에서는 소속 2사에 명령하여 2사의 5퇀과 6퇀이 희샤즈요 이동에서 적들을 맞받아 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군부 직속교도퇀과 포병련, 부녀퇀, 청년의용군을 희샤즈요 동북면에 매복시키였다. 일부 부대는 적들이 지나칠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여놓았다.

정오 12시에 적들의 군용트럭이 아군의 지뢰매설구에 들어섰다. 지뢰수들이 도로량측에 매복하여있다가 전투신호와 함께 지뢰의 도화선을 잡아당기였다. 삽시에 적군의 트럭 6대가 박살나며 수라장이 되였다. 뒤따르던 트럭들은 길이 막히며 꼼짝달싹 못하였다. 이때라고 포병련의 포탄이 울부짖으며 나머지 적군트럭을 들부셔놓았다. 평소 키가 크고 힘장사라는 평판에다가 으뜸가는 미인이라고 받들리는 리봉선은 왕옥환(王玉环)퇀장의 지휘하에 여러 녀전사들과 더불어 희샤즈요 동북면에서 멸적의 총탄을 퍼부었다. 기관총수 주신옥은 백발백중으로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히였다.

4시간의 격전을 거쳐 희샤즈요저격전은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 250여명이 황천객이 되고 중위와 상위 이하 28명이 아군의 포로로 되였다. 로획한 총과 탄약은 부지기수였다.

1936년과 1937년은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과 더불어 5군력사의 황금기로 알려진다. 관련 연구자료에 따르면 1937년에 이르러 5군부녀퇀은 시초의 10여명 조선족녀전사들로부터 300명의 대오를 가진 무장력량으로 탈바꿈하였다. 부녀퇀은 왕옥환퇀장을 기치로 왕옥환, 주신옥, 편련화(片莲花)를 각기 대장으로 하는 3개대로 발전하였으며 왕일지(王一知), 리지웅(李志雄), 랭운(冷云) 등이 선후로 지도원으로 나섰다. 부녀퇀 산하에는 보병과 기병, 정찰병, 통신병, 기관총수들이 구전하고 밀영병원과 재봉대 등 후근 일에도 수시로 나설수 있었다.

부녀퇀은 5군군부의 직속대로서 일반적으로 5군군부의 지도를 받으며 군부를 따라 행동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류동성도 커서 늘 5군의 여러 부대들에 파견되여 분산활동을 하면서 맡겨진 과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름을 알수있는 부녀퇀의 조선족녀전사들로는 주신옥(朱信玉), 최순선(崔顺善), 리봉선(李凤善), 리영숙(李英淑), 김봉숙(金凤淑), 김씨, 최수선(崔秀仙), 류경희(柳庆熙) 등으로 헤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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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12일, 대대장 리문빈(李文彬)이 지휘하는 삼도하자(三道河子) 삼림경찰대대 150여명(부녀퇀 녀전사 서운경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700여명이라고 한다)이 일본교관 7~8명을 죽이고 의거하여 넘어왔다. 의거부대가 삼도통(三道通) 동안에서 서안으로 넘어올 때 리봉선 등 부녀퇀전사들은 새 군복을 가뜬히 차려입고 먼길을 걸어 삼도통으로 가서 5군 군장 주보중 등과 함께 맞이했고, 배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의거가족 50~60명(徐云卿의 회고)을 설복으로 바삐 보내였다. 의거가족들이 삼도통에 배치된후에는 정서파동이 심한 그들을 안정시키면서 간고한 항일련군 부대생활에 적응하도록 이끌었다. 부녀퇀의 열성에 넘친 도움으로 류영(刘英) 등 의거가족 10여명이 후방밀영에까지 찾아와 돌아가지 않고 함께 싸우겠다고 표시하였다.

1937년 가을에 적들의 추기대토벌이 시작되였다. 향수하자(响水河子), 쟈피거우 (夹皮沟)등지에 설치된 5군의 후방기지-밀영과 병원, 재봉대 등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리봉선 소속 부녀퇀은 9월에 5군군부를 따라 목단강 좌안의 사도하자(四道河子) 후방밀영으로 전이하였다. 9월 29일, 이곳 사도하자 후방밀영에서 중공길동성위 상무위원회 사업회의가 열리고 항일련군 제4군과 5군, 7군, 8군, 10군을 망라한 제2로군을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제2로군 총지휘로 주보중 5군 군장을 추대하였다. 회의기간에 리봉선과 그의 소속 부녀퇀은 성위 사업회의의 작식과 근무를 리행하면서 회의의 순리로운 진행에 최선을 다하였다.

9월의 성위회의이후 5군부녀퇀 퇀장 왕옥환과 진옥화(陈玉华), 최순선, 주신옥, 류영 등은 장진화(张镇华)사장의 기병사를 따라 보청(宝清)일대에로의 원정길에 나서고 나머지 녀전사들은 5군의 여러 부대에 귀속되여 활동하게 되였다.

1937년 겨울과 1938년 봄에 이르러 삼강성(三江省,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일대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대토벌은 보다 가심화해졌다. 적들의 발광적인 군사토벌과 경제봉쇄를 짓부시며 하동(哈东)지구와 남만 항일련군부대와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는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서정군은 5군 1사를 선견대로 하고 4군 1사와 5군 2사를 한갈래, 4군 2사와 5군 교도퇀을 한갈래로 하여 3개부대로 편성되였다. 주보중 등과 5군 3사, 7군, 8군, 9군, 10군은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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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 세갈래 서정군은 보청에 집결하였다가 5월에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리봉선 등 5군 부녀퇀의 한갈래가 서정부대와 함께 머나먼 원정길에 올랐다. 그들은 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심산밀림을 헤치였다. 서정길은 그야말로 기아와의 싸움, 대자연과의 싸움, 적들과의 싸움이였으나 녀전사들은 조금치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리봉선은 녀전사들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고 받들며 걸음마다 사선을 헤치며 나아갔다.

7월 1일, 서정부대 책임자 송일부(宋一夫)는 서정지휘부 회의를 가지고 주보중의 서정계획을 개변하면서 4군과 5군이 함께 서란(舒兰)으로 진출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관서범(关书范)은 5군 1사 150여명 선견대를 이끌어 출발하고 5군 군장 채세영(柴世荣)은 송일부 등과 함께 삼도통을 습격하고 12일 아침 주하현(珠河县, 오늘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 전투를 벌리였다. 그러나 우리 서정부대의 루산진에서의 행동은 이미 적들에게 드러나 비행기가 폭격하고 지면부대가 사처에서 달려드는데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격전이 벌어지며 부대의 손실은 막중하였다.

주하현 루산진 전투후 나머지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 나뉘여지고 제4군의 안순복 등 녀전사들은 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1938년 8월 말에 서정부대는 할빈 이서의 오상현 경내에 들어섰다. 부녀퇀 소속 5군 1사는 5군 2사와의 련계를 잃은데서 관수범은 적들의 포위를 헤치면서 1사의 나머지 100여명 대오를 동으로 조령근거지 방향으로 돌리였다. 5군군부를 찾아 다시 적들과 싸우기위한 대책이였다.

이때 부녀퇀의 녀전사는 랭운(冷云), 안순복(安顺福), 리봉선(李凤善),호수지(胡秀芝), 양귀진(杨贵珍), 곽계금(郭桂琴), 황계청(黄桂清), 왕혜민(王惠民) 등 8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5군 1사를 따라 풍찬로숙하면서 해림의 불탑밀북창자(佛塔密北淌子)에서 투도하자(头道河子)강을 넘어섰다. 반라자(半砬子)에서는 산림경찰대의 배 세척을 탈취하여 가지고 도도히 흐르는 목단강을 건너고 망천령(望天岭)을 넘어 오늘의 림구현 경내 동류수하자(东柳树河子) 북골에 들어섰다. 한총하(寒葱河)와 몇개 산령을 넘으니 이미 10월 초순이다. 다시 소과회산(小锅盔山)에서 조령의 삼가자(三家子)촌을 에돌아 줘무강(柞木岗) 동쪽의 습지(草甸子)를 지나며 우스훈하(乌斯浑河) 하류의 서안 줘무강산아래 우스훈하가 굽이를 타는 곳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바로 오늘의 림구현 경내 조령진 줘무강 산아래 우수훈하 서안이다.

5사 1사의 지도자는 사장 관서범과 참모장 김석봉이였다. 김석봉은 1887년생이고 쏘련의 동방대학에서 공부를 한 지식인으로서 1929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로련한 혁명가로 알려진다. 1936년 9월 5군군부 류수처 부주임이고 중공도남특위 위원이기도 한 김석봉은 실상 항일련군과 당내에서의 직무가 더욱 높아 항일련군 제2로군 비서장과 중공길동성위 비서처 주임으로도 나타난다. 1938년 5월 제4군과 5군으로 무어진 제2로군의 서정에 참가한후에는 서정부대의 주요책임자의 한사람으로 군부직속 부녀퇀을 친히 이끌었다. 한데서 김석봉은 부녀퇀의 녀전사들, 더우기 안순복, 리봉선 등 조선족녀전사들과의 관계가 스스럼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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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훈하 서안에 이른후에도 그러하다. 김석봉은 사장 관서범과 토의하고 나머지 5군 1사 부대를 이끌어 우스훈하를 건너 의란현 토성자일대의 목단강 류역에 가서 주보중이 이끄는 제2로군 총부와 5군 련락처를 찾으려 하였다. 부대는 련일 이어지는 간거한 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치며 굶주림에 시달린데서 밤을 우스훈하가에서 숙영하고 날이 밝으면 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그런데 춥다고 피워놓은 몇무더기 우등불이 마침 주변을 지나던 원 항일련군 9군 부관이고 반역자인 갈해록(葛海禄)에게 발견되니 일이 험악하게 번져갔다. 갈해록의 고발로 조령 일본군사령관 구마가이 대좌(熊谷大佐)는 밤도와 일본군과 위만군 1000여명을 출동시켜 5군 1사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포위하고들었다.

10월 10일 새날이 밝아오자 1사의 조선족 참모장 김석봉은 부녀퇀의 리봉선 등 8명 녀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강을 건너게 되였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며 강물이 불은데서 강물의 깊이를 알수가 없었다. 김석봉은 녀전사들의 안전이 걱정되여 선참 강물에 뛰여들어 대안으로 나아갔다.

그때다. 난데없는 총소리와 함께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였다. 랭운과 안순복은 뒤늦게야 부대가 적들에게 포위된것을 알고 녀전사들과 함께 적의 배후를 답새기기 시작하였다. 적들을 자기들한테로 끌기 위한 선제사격이였다. 적들은 과연 아군의 매복에 든줄로 여기고 일부 병력을 급급히 녀전사들쪽으로 돌려대였다. 그사이 100여명 대오는 신속하게 떡갈나무골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부녀퇀의 녀전사들만 강변속에 남겨두고 떠날수가 없다. 적들이 우리 녀전사들을 알아보고 빨리 투항하라고 고함지를 때 부대는 수차 돌아서서 녀전사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적들의 포위권돌파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리봉선 등은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탄알이 떨어지자 모두가 우스훈하에 뛰여들었다. 그녀들이 사품치는 강물과 사투를 벌리며 강심으로 나아가자 적들은 투항하라고 소리치다말고 급기야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며 박격포탄을 쏘아댔다. 그녀들은 우스훈하 강물속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우스훈하는 목단강시 림구현 조령진 경내를 흐르는 목단강의 한 지류로서 만족어로 《사품치는 강》(汹涌的河流)이란 뜻을 가지였다. 이미 강대안으로 건너간 김석봉은 녀전사들이 적들과 싸우는것을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리봉선 등 8명 녀전사들은 김석봉을 따라 강을 건넜더라면 모두가 살수 있었으나 그게 아니였다. 그들은 적들의 주의력을 자기들한테로 끌며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김석봉은 8녀투강의 전과정을 목격한 유일한 견증자였다.

그날의 적장 구마가이는 투항하라는 고함소리에도 굴함없이 싸우다가 강심에 들어서는 8명 녀전사들을 보고 《독한 년들》이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후에도 《중국은 녀인들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멸망시킬수 없다…》고 길게 탄식한 모양이다.

그때 강의 깊이와 물길을 알려고 먼저 강을 건넌 김석봉은 그후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졌다. 별수없이 그는 길림성 영길현 산구로 돌아갔고 이름을 김상걸(金尚杰)이라 변성명하고 살다가 1962년에 당적을 회복하고 1970년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김석봉은 살아있을 때 관련부문에 8녀투강의 진실한 목격과정을 여실히 알리였고 그날 포위를 헤치고 나온 전우와 함께 8녀투강의 진실한 위치를 확인하여주었다. 그 확인으로 하여 관련부문은 1982년에 림구현 조령진 줘무강 산아래, 우스훈하 서안을 8녀투강 순난지로 정식확정할수 있었다.     

/2015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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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2년 10월, 림구현 조령진 삼가자촌 동북 4키로메터되는 우스훈하 동안 산비탈에 세운 8녀기념비와 8녀투강 형상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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