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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길림신문이 만난 사람 ]한 재한 로화교의 애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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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자| 작성일 :19-11-13 13:09| 조회 :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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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한 로화교의 애국정


편집/기자: [ 홍길남 전춘봉 김수영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1-14 12:21:09 ] 클릭: [ ]

 

 

기획-[길림신문이 만난 사람]

-중한 수교의 공훈특사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성호의 이국생활 60여년을 더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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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호(韩晟昊)프로필(简历)

1927년 8월 28일 중국 길림성 장백현 출생

1948년 7월 조선을 거쳐 한국에 정착

위만시기 길림사도대학 수업

한국 경희대학 한의과 수업

신동화한의원 원장

미국 캘리포니아 골든주립대학 식품영양학 명예박사

한화중국평화통일추진련합총회 회장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국에서 한성호라는 이름을 대면 아마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것은 한성호가 리시진의 《본초강목》 등 의학저서들을 참고로 현대인들속에서 성행하고있는 자연식료보건료법을 발견하여 저명한 한의로 한국에서 이름을 떨친것도 있지만 중한 수교의 물고를 터치운 전기적인물이기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마가을도 막가는 어느 날, 필자는 한국 서울에서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성호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장소는 그의 사무실이였다. 그와 반나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85세라는 년세와는 달리 그는 시종 젊음의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60여성상 한국에서의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경력을 들으면서 필자는 나서 자란 고향과 조국에 대한 한성호의 깊은 사랑을 력력히 읽을수 있었다.

서울 강남의 붉은집은 그의 중국심

서울 최고 부자동네인 강남의 한 거리에 가면 류달리 붉은 칠을 한 3층짜리 건물이 높은 건물빌딩사이에 당당하게 앉아있다. 붉은 칠로 류다른 느낌을 주는 이 붉은집 주인이 바로 재한 화교계의 수령인 한성호다.

집색갈을 두고 크게 두번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한번은 한국친구들이 붉은색이 촌티가 나는데 좀 세련되고 현대맛이 나는 색갈로 바꾸라고 건의했다. 이에 한성호는 《나는 중국사람이요. 중국사람에게서 붉은색은 길한것을 뜻하오. 또 붉은색은 심장을 상징하는데 변함없는 중국에 대한 내 마음이요.》하고 말했다. 그후부터 친구들은 더 말리지 않았다.

다른 한번은 중한 수교이후 일부 소위 대만독립을 웨치는 세력들이 집색갈을 떠올리면서 한성호를 비난했다.《이건 〈빨갱이(공산당이나 홍군을 비하하는 말)〉색갈이다. 한성호는〈빨갱이〉다.》이에 한성호는 떳떳하게 반격했다. 《그렇다. 이 한성호는 〈빨갱이〉다. 나는 중국공산당을 옹호하는 〈빨갱이〉다.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빨갱이〉다.》

이 두번의 말썽이 있은 다음부터 한성호더러 층집 색갈을 바꾸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으며 한성호의 붉은 중국심은 붉은집과 더불어 한국에 더 널리 알려졌다.

재한 여러 민족 중국인들의 조국사랑 지펴

현재 한국에는 재한 중국인이 70만명 시대에 육박했다. 그중 조선족이 50만명에 달하고 기타 민족 중국인이 20만명에 이른다.

한국의 경우 중국과 수교하기전에는 재한 중국인의 대부분이 대만적화교들이였다. 중한 수교후 조국대륙으로부터 한국으로 간 중국인들이 부쩍 늘면서 그들은《신화교권》을 형성했다. 그러나 확실한 교류의 장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전국 각지에서 간 여러 민족 중국인들은 흩어진 모래알신세로 되였다.

한성호는 주한 중국대사관, 령사관에 적극 문제를 반영하고 중요한 건의를 제기하고 재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단합해 재한 중국인사회를 통일적으로 집결하는 사업을 벌이는 한편 늘 나라의 정책과 발전하는 현실, 조국통일을 위한 대업, 또 여러 민족 인민들에 대한 나라의 배려를 제때에 전달했다.

점차 재한 여러 민족 중국인들은 조국의 따사로움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한곬으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인생신조는 효

한성호는 언제 어디서나 바른 말을 하고 불의와 사악에 타협을 모르는 초인간적인 투사이다. 효에 대해 그는 세가지 준칙이 있다. 부모에 대한 효는 소효(小孝), 민족에 대한 효는 중효(中孝), 인류에 대한 효는 대효(大孝)이다. 때문에 조상을 팔아먹는 불효, 민족을 분렬시키는 불효, 인류에 피해를 주는 불효에 대해서는 한없이 증오하고 무자비하게 배격했다.

1948년 7월, 한성호가 한국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중국 대만《대사관》관할하에 있는 한국 화교사회는 엉망진창이였다. 곳곳마다 기생집, 도박장, 아편관이였고 무리싸움이 끊임없었다.

화교자치구역의 문서조장을 맡은지 얼마 안된 한성호는 이런 루추한 꼬락서니를 보고 너무 화가 치밀었다. 이야말로 중국사람의 큰 망신이였다. 한창 혈기왕성한 그는 화교사회의 추악상을 바로잡기로 작심했다. 하여 그는 《화교기풍바로잡기위원회》를 설립하고 자기가 부회장 겸 총간사를 맡았다.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화교사회에서는 아편과 도박과 기생을 몰아내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기실 한성호는 아편쟁이나 기생집 업주들과 원쑤진 일은 종래로 없었다. 그는 다만 티없이 맑고 끓어넘치는 정의감 그 하나로 화교사회의 추악한 현상을 바로잡고 이 땅에서 중국사람들더러 사람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그 주장뿐이였다.

한성호는 그후 고명한 의술과 연박한 지식, 한의학연구의 높은 성과 및 고매한 인격으로 많은 한국인들의 존경과 애대를 받았다.

1987년 4월, 한성호는 40년만에 그리운 고향땅을 밟게 되였다. 그때 그는 북경에서 40년전에 자기에게 억울한 루명을 씌웠던 당시 장백현의 한 주요 책임자와의 우연한 상봉에서 정부는 이미 과거의 오유를 검토했고 자기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드디여 고향 정부에 대한 기나긴 오해를 풀게 되였다.

고향과 작별하고 귀로에 오르면서 한성호는 날따라 변모하는 조국의 모습과 실사구시하고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공산당의 집권실적을 친히 목격하면서 불원한 장래에 조국은 기필코 부강하고 번영하리라는 확신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통령 밀사로 중한 수교 물고 터치워

1988년 3월 1일, 한성호는 갓 취임한 당시 한국대통령 노태우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 대통령관저로 갔다.

노태우는 자기의 뜻을 밝혔다.

세계에서의 중국의 영향은 날따라 커지고있다. 한국은 비교적 발달한 나라이지만 국내자원이 결핍하기에 장기적으로 발전하자면 반드시 국제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중국은 한창 발전하고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이다. 경제발전의 각도에서 보면 속히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경제합작을 강화해야 한다.

한성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중한 량국이 서로 거래하지 않고 우호적이 아닌 국면은 반드시 개변되여야 합니다.》

《량국의 우호관계를 맺는 일을 한박사님께서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노태우의 뜻에 따라 한성호는 대통령의 밀사로 그해 4월에 산동에 가서 당시 산동성당위 부서기이며 성장이였던 강춘운(그후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을 만나 중국 중앙정부의 비준을 얻은 상황에서 쌍방이 한국과 산동을 기지로 중한 량국의 경제교류를 시작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88년 6월 16일과 8월 25일, 한성호의 조률하에 40년간 등지고 살아온 중국인과 한국인이 선후로 산동과 서울에서 조심스럽고도 우호적인 태도로 경제교류담판석에 마주앉았다.

겉보기엔 한 나라와 한개 성의 교류인듯했으나 실상은 중한 쌍방의 경제무역 교류와 합작이 정식으로 시작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으로 중한 수교의 토대가 닦아졌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은 동시에 외교성명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수교를 달성했다.

중한 수교로 한국주재 중국 대만《대사관》은 대표부로 내려앉고 중국대사관으로부터 밀려나갔다.

중국외교관들이 대사관에 입주하는 날, 한폭의 붉디붉은 오성붉은기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주악속에서 서울의 맑고 푸른 하늘로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때 한성호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이날이였던가!

나는 《소애국》이 아니라 《대애국》을 주장한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대만독립세력의 활동은 더욱 창궐해졌다. 한성호는 각종 요언을 분쇄하고 시비를 가르고 대만독립세력에 진공을 발동하기 위해 잡지《중국천지》를 창간했다. 그는 언론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면서 중화의 평화적통일을 위해 노력하련다고 표했다.

그는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격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대만독립을 반대하는것은 중국령토의 완정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대만이 독립하고 국토가 분렬되는것은 대역무도한 죄행이다. 나는 결코 어느 한 정당의 립장에서만 문제를 보지 않는다. 나는 〈대애국〉을 주장하고 〈소애국〉은 주장하지 않는다. 량자는 다 애국이긴 하지만 그들의 공간이 다르고 경중이 부동함으로 동일시할수 없다.》

이렇게 한성호는 들끓는 애국열정으로 대만독립을 꿈꾸는 자들을 힐책했을뿐만아니라 리등휘, 진수변 등을 비롯한 부패한 대만당국의 속구구까지 적라라하게 폭로했다.

기실 한성호는 20세기 50년대에 국민당에 근무한적 있었다. 1957년 7월의 어느 날, 한성호는 대만 국민당 정계와 화교사회의 추악상에 대한 실망과 국민당 당국에 대한 불신임때문에《대만내정부조사국》동북구 판사처 조직과장 등 일곱가지 직무를 한꺼번에 사퇴해버렸다.

그때 한성호는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터놓았다.

《공산당은 날따라 강대해지고있다. 대만 국민당이 공산당을 뒤엎는다는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한성호는 근년에 또 서울중국교민협회와 한화중국평화통일추진련합총회를 설립하고 자기가 직접 회장을 맡았다. 열흘을 사이두고 진행된 두 협회 설립의식장소에는 번마다 오성붉은기가 정히 꽂혀있었다.

살아서는 중국인이 되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1993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중한 수교 추진 및 경제무역발전, 한의학연구에 특수한 기여를 한 한성호에게 한국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국민훈장은 한국의 최고영예이다. 한성호는 한국 건국 40여년래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외국인이였다.

한국의 법률에는 한국국민이 국민훈장을 수여받으면 30여종의 대우를 받을수 있지만 외국인으로서 한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으면 국민훈장을 받은 후의 각종 대우는 자연포기된다고 규정되여있다. 하여 많은 친구들이 그더러 한국국적에 가입하라고 극구 권고했지만 한성호는 한사코 사절했다. 그는 다만 중국인의 존엄과 중한 량국의 우호만을 소중히 여겼을뿐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는 중국인으로 살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중국은 강대해져야만 한다

2005년 10월의 어느 날, 한성호는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초청을 받았다. 강연할 때 한 대학생이 지금 어떤 나라들에서는 《중국위협론》을 꾸미고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했다.

《그들이 〈중국위협론〉을 운운하는것은 중국이 아직도 강대하지 못하다는것을 증명할따름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진정 강대해진 다음에는 그들이 〈중국위협〉이란 말은 입밖에 내지도 못할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빈 구호를 웨칠 때가 아니라 각자 모두 자기의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애국행위입니다.》

강연이 끝나자 북경대학에서는 한성호를 MBA련합회 자문고문으로 초빙했다. 백여명의 대학생들이 삽시에 애국화교 한성호를 에워싸고 저마다 싸인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북경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눈부셨다. 한성호의 웃음 띤 얼굴은 광채로 빛났고 마음은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올랐다.

이같이 한성호는 60여년 이국생활에서 아무런 가식도 없이 중국인의 기개와 량심을 굳게 지키면서 떳떳이 살아왔다. 오늘도 한성호는 조국의 평화와 부강을 위해, 중한 교류와 합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있다.

한성호가 쓴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노니

개인의 득실에 초연하고

산과 들을 사랑하노니

견강함은 당연하니라

분렬과 부패를 반대하노니

좋다든 밉다든 태연하고

하늘과 땅을 사랑하노니

갈 곳은 오직 자연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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